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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타운 재개발과 한인 상권

최근 그래픽 디자이너 이상모 씨가 출간한 ‘로고LA’에는 이 씨가 지난 50년간 제작한 수백개의 한인 업체 로고가 담겼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이 씨의 라카냐다 홈오피스는 LA한인 상권의 역사박물관이었다. 1970년대 초 한국에서 로고 작업을 한 광고도안, 광고 의약품, 1975년 한인록, 70년대부터 최근까지 광고도안, 출판물, 사진 등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1990년대 컴퓨터 디자인 시대 진입 전인 활판인쇄 시절, 광고 도안 작업은 100% 수작업이었다. 홈오피스에는 이 씨가 직접 광고용 그림을 그리고 광고기사를 써서 수작업한 광고도안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가 지금은 볼 수 없는 진귀한 자료라고 꺼낸 것은 50년 전 발간된 1975년 한인록. 목차부터 한 장 한 장 넘기는 사이 누렇게 변색한 광고 페이지 종이가 으스러졌다. 종이는 50년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그 당시 한인사회 옐로페이지 격인 한인록은 광고 홍보물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 긴급전화, 구급차, 한인 언론기관 독자상담실, 교통서비스, 지역 번호와 미주 내 시차,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 표시까지 이민생활의 가이드북이었다. ‘나성’에 막 도착한 누구라도 한인록 한 권이면 집을 구하고, 일을 찾고, 심지어 지인의 주소와 연락처도 찾을 수 있었다.     이 씨에 따르면 70년대 중반 한인 이민 폭증으로 집과 비즈니스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면서 부동산 광고도 많았다.  지금도 운영 중인 아주부동산을 비롯해 국제부동산, 소니아석 부동산이 당시 가장 큰 부동산 회사였다. 식당 광고는 ‘가고파’, ‘동원식당’ 등 수가 적었다. 전파사 ‘리스TV’, ‘박스전자’에서 한인들은 가전 살림을 마련했다.     이 씨는 광고 페이지마다 그 당시 한인 업체 이야기를 풀어내며 70년대부터 한인 상권을 소환했다. 한인 상권에 대한 그의 기억은 ‘로고LA’ 책에서 이어진다. 책 속 연대별 업체 로고도 한인 상권의 흥망성쇠를 대변한다.     이 씨가 로고디자인을 가장 많이 한 1980~90년대는 한인 상권의 기틀이 마련되고 발전한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그가 로고 디자인 작업을 한 업체 중 지금도 운영 중인 곳이 25개가 넘는다.  김스전기, 수원갈비, 아주부동산, 베버리웨스턴 덴탈 등도 그중 일부다.       LA한인타운에서 장수 업체를 찾아보기 힘든 요즘 ‘로고LA’에는 이들 업체의 건재함이 살아있다. LA 한인타운 노포식당과 업체 매장들은 2010년대 LA가 재개발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시작된 주상복합 건립 프로젝트로 인해 빠르게 사라졌다.     팬데믹은 한인 상권에 직격탄이었다.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으로 대거 옮겨가면서 한인 상권의 폐업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팬데믹 이후 문을 닫은 노포식당도 전원식당, 베버리순두부, 동일장, 전주돌솥 등 수없이 많다. 1994년 문을 연 전원식당은 수십 년 운영해왔던 8가와 베렌도 코너 ‘센터플라자’ 부지가 7층 주상복합건물로 개발돼 이전했다가 팬데믹 때 문을 닫았다. 역시 8가 선상에 있던 대표적인 노포식당 동일장 자리에는 8층 주상복합 건물 ‘더 파크인 LA’가 들어선다. 전주현대옥 등 수십년간 식당 자리였던 윌셔와 버질 인근의 상가도  8층 주상복합 건물로 탈바꿈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주상복합 건축 붐으로 한인타운에는 3000유닛이 넘는 신규 아파트가 완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LA한인타운에 주상복합 건물 개발이 늘면서 비한인 거주자와 비즈니스의 유입은 늘고 있지만 한인 업소는 조용히 감소하고 있다.     이 씨는 ‘로고’는 회사나 단체를 대신하는 얼굴이라고 했다. 한인 업체 로고는 곧 한인 이민사이면서 한인타운의 얼굴이기도 하다. 친숙한 한인 업체의 간판과 로고가 사라지는 것은 한 비즈니스의 흥망성쇠를 넘어서 한인 사회 얼굴이 사라지는 것이다.  한인 상권이 주상복합 건축 붐을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재개발 타운 la한인 상권 한인 업체 당시 한인사회

2024-10-15

[사설] 한인 정치력 새로운 전기 맞았다

한인사회의 정치력이 새 전기를 맞았다. 지난 8일 치러진 중간선거 결과 한인 연방하원의원 4명의 동반 연임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앤디 김(뉴저지주 3지구.민주) 의원과 메릴린 스트릭랜드(워싱턴주 10지구. 민주.한국이름 순자) 의원은 경쟁자를 여유 있게 따돌리며 일찌감치 승리를 확정 지었고, 영 김(가주 40지구.공화), 미셸 박 스틸(가주 45지구.공화) 의원의 재선도 확실시된다. 지난 선거와 비교해 의원 숫자는 변화가 없지만 3선 1명과 재선 3명으로 무게감이 다르다. 특히 앤디 김 의원은 3선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인 3선 연방하원의원 탄생은 김창준 전 의원 이후 26년 만이다. 3선의 김 의원은 이제 중진의 반열에 올라서며 민주당 내에서는 물론 연방하원에서의 영향력도 한층 커질 전망이다. 또한 미셸 박 스틸, 영 김 의원은 공화당 연방하원의 남가주 지역 보루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당내 위상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당선은 한인사회 전체가 축하할 일이다. 연방의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무게감 있는 의원들이 생긴 것이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당장 “한인들의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목표 중 하나”라는 당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 의회에서 논의될 각종 한국 관련 이슈들에 이들의 영향력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임 성공의 이유는 무엇보다 활발한 의정활동이다. 이들은 지난 2년간 다양한 입법활동을 통해 각계각층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했다. 이런 실적이 유권자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줬고 다시 선택받는 원동력이 됐다. 한인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도 큰 역할을 했다. 한인들은 이들의 연임을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줬다. 선거기간 상당한 후원금을 전달한 것은 ‘몰표’로 힘을 보탰다. 그런가 하면 선거캠프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한 한인도 많다.       한인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한인사회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2년 발생한 4·29 LA폭동 과정에서 한인사회는 정치력 부재의 서러움을 절감한 바 있다. 당시 한인사회는 최대 피해자였음에도 앞장서 억울함을 대변해 주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다. 미래 한인사회의 주역이 될 2세, 3세들에게 이런 참담한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줘서는 안 된다. LA폭동 30주년인 올해  4명의 한인 연방하원의원을 배출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더 크다.     많은 성과도 있었다. 그동안 전국의 한인사회는 많은 선출직 공직자를 배출했다. 또한 유권자 등록 캠페인 등을 통해 투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확산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정치인 후원 방식의 변화다. 그동안의 정치인 후원이 친분관계나 사업상 필요성 등 개인적 차원 위주였다면 최근에는 훨씬 조직화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도 미주정치력신장위원회, 한미정치연합(KAPA) 등 한인 정치후원단체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한인사회의 결집된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런 흐름을 반영, 본지도 한인 언론으로는 유일하게  ‘후보 공개지지(endorsement)’ 를 통해 한인 유권자들의 올바른 선택을 도왔다.       하지만 한인 정치력 신장은 아직 갈 길이 멀다. 4명의 연방하원의원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연방하원의원은 물론 전국의 로컬정부 선거에서도 꾸준히 당선자를 배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능성 있는 정치 신인들을 발탁하고 지속해서 후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한인사회도 AIPAC(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같은 조직의 구축이 필요하다. 앞으로 한인 연방상원의원, 한인 주지사, 한인 대통령의 탄생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사설 정치력 한인 한인 정치력 한인사회 전체 당시 한인사회

2022-11-09

"한인사회 다층적 불편함 그대로 담았죠"

"첨예하게 다르지만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이들의 사투가 아닐까요."   다음 달 3일 개봉을 앞둔 다큐멘터리 영화 '초선(CHOSEN)'을 연출한 전후석 감독은 미국 선거 역사상 최다 한인 후보가 출마한 2020년 하원의원 선거를 지켜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한인 변호사 출신인 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당시 하원 선거에 출마한 한인 후보들을 따라가면서 미국 내 한인사회의 현주소를 그려냈다. 26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 서울 호텔에서 만난 그는 "민감하고 어렵고 불편한 지점이 많이 있겠지만 이념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끼리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봐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데뷔작 '헤로니모(2019)'를 통해 쿠바의 한인사회를 조명했던 전 감독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읽고 '초선'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볼턴을 비롯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의 충동적 결정에 의해 하노이 회담이 결렬됐다는 걸 보면서 한 국가의 평화 체제가 미국 정치인 몇 명에 의해 무마될 수 있겠다는 자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한인들이 저 위치에 있었다면 좀 더 우호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호기심이 생겼죠."   영화는 데이비드 김, 매릴린 스트리클런드, 미셸 박 스틸, 앤디 김, 영 김까지 총 다섯 후보의 선거 과정을 담았다. 이들의 이력은 다채롭다. 이민 1세대와 2세대, 공화당과 민주당, 정치계 주류와 비주류가 뒤섞여 있다.   전 감독은 "다섯 후보의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있는 그대로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자신의 스토리를 영화에 담도록 허락해주셨는데 행여나 영화가 누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험하기에 좋은 영화는 아니었죠. (웃음) 그들의 정치적 스탠스가 확연히 드러나는 만큼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걸 보고 불편함을 느끼거나 동질감을 느끼는 건 관객의 몫이죠."   다섯 후보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건 데이비드 김이다. LA 한인타운이 속한 지역구에 출마했던 그는 이민 변호사이자 성 소수자로, 가장 진보적 성향을 보였다. 당시 한인사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음에도 5 포인트 차로 낙선하며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데이비드 김은 한인 사회의 다층적인 불편한 지점을 드러날 수 있게 한 후보거든요. 세대 갈등, 이념 갈등, 종교 갈등, 인종 갈등, 성 소수자에 대한 이견까지 모든 것이 그 후보 한 명에게서 나올 수 있었죠. 또 나머지 네 후보는 정치적 입지가 있었던 반면 데이비드 김은 완전한 '언더독'(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일컫는 말)이었어요. '언더독의 반란'을 조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들 다섯 후보는 11월 중간선거에도 출마한다. 전 감독은 "굉장히 치열한 선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만약 데이비드 김이 당선되면 한인사회뿐 아니라 미국 주류에도 신선한 바람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헤로니모'에 이어 디아스포라(재외동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전 감독은 "'초선'을 찍으면서 한인 디아스포라와 관련한 소재를 더 발굴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고 말했다. "드라마 '파친코'를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 이야기가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게 증명됐다고 생각해요. 정말 소재가 무궁무진하거든요.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계속 영화로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한인사회 다층 한인 후보들 당시 한인사회 다큐멘터리 영화

2022-10-28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1972년은 남가주 한인사회의 변곡점이었다. 그해 2월, USC 인근 옛 동지회 회관에 ‘무궁화 학원(현 남가주 한국학원)’이 문을 열었다. 두 달 후 대한항공은 서울-LA 노선의 첫 운항을 시작했다.   ‘한인회’란 명칭도 이때 처음 생겨났다. 당시 남가주한인거류민회에서 새롭게 간판을 바꿔 단 남가주 한인회는 첫 주력 사업으로 ‘한인록’을 발간했다. 그해 11월 2일이었다. 한인회가 선보인 최초의 한인록이었다. 한인록 발간은 한인 이민 역사의 자부심이었다. 당시 남가주 한인회 조지 최 회장은 발간사에서 “한인록이 교포 사회의 길잡이가 되고 서로 친교 하는데 다리가 되길 바란다”며 “그 힘으로 ‘제2의 한국’을 이 땅에 세우는 데 이바지한다면 그 사명을 다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UC리버사이드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당시 한인록을 장태한 교수로부터 입수했다. 한인록은 50년 전 미주 한인 사회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누런 종이 위 흑백 광고들은 ‘1972년’을 살아갔던 한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인록 제작은 당시 한인사회의 염원이었다. 남가주 한인회 조지 최 회장은 발간사를 이렇게 적었다. “한인록 한번 만들어내자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일의 방대성과 소요자원 조달의 난관으로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교포 여러분의 지원과 협조를 얻어 밤낮으로 애써 온 결과 마침내 책자를 내놓게 됐다”. 당시 소상영 LA총영사(4대 공관장)는 축간사를 통해 “10년 전 수천 명에 불과했던 나성지역 교민 수가 이제는 약 4만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됐다”며 “이러한 대가족이 협동 단결하여 소수민족 사회의 모범이 되고 미국 사회에 적극 진출해 한민족의 우수성과 유용성을 과시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인록은 총 315페이지다. 크게 ▶업소록(500여 업소·기관·단체) ▶인명록(약 4800여 명)으로 나뉜다. 쉽게 말하면 미주 한인 사회판 ‘화이트 페이지(인명별 전화번호부)’와 ‘옐로 페이지(업종별 전화번호부)’인 셈이다. 한인록 편집은 당시 키스프린팅을 운영하던 김광제씨가 맡았다. 김씨는 편집후기에서 “5개월간 밤낮으로 일해온 보람이 있다. 하지만, 교포들의 주소 이전이 잦고 자료 근거가 불명확하여 완벽한 주소록을 내놓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정확하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나 이것이 연례사업이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보다 완벽한 책자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인록의 첫 전면광고(15페이지)는 대한항공이다. ‘라성-서울 직행’.   미주 여객 노선 취항 첫해인 만큼 한인록의 첫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굵직한 볼드체로 적힌 전화번호(213-484-1900)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항공 미주 지역 서비스센터 번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미주 한인사회와 비교하면 규모만 작을 뿐 여행사, 보석상, 리커스토어, 마켓, 언론사, 술집, 비영리단체, 렌터카 업체, 극장 등 없는 게 없다. 한인록을 업종별로 분류해봤다. 먼저 금신엔터프라이즈(LA), 반도무역(LA), 대화물산(샌타모니카), 동양물산(가디나) 등 무역 관련 회사가 77개로 가장 많았다. 가발 업소는 총 57개로 두 번째로 많다. 그만큼 가발업이 당시 한인들의 주요 사업 종목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번째는 요식업이다. 대원각(LA), 이화원(LA), 최가네 식당(컬버시티), 왕관식당(LA) 등 총 24개의 식당이 한인록에 수록됐다. 이어 식료품점 및 마켓(20개), 리커스토어(11개), 태권도장(12개), 기계 수리 업소·회계사 사무실(각각 11개), 여행사(10개), 보험사(9개), 전자 제품 출장 수리 업체(9개), 미용실·봉제업체·병원(각각 7개), 트로피 제작·양복점·부동산·인쇄소(각각 6개), 차량 정비소·사진관·자동차 딜러·한의원·꽃집(각각 5개), 건축 업체·옷가게(각각 4개), 치과·술집·트럭킹 회사(각각 3개) 등의 순이다. 이때도 교회는 한인사회의 중심축이었다. 한인록에는 동양선교교회, 한인연합감리교회 등 교회(44개) 및 교계 단체(10개) 등 총 54개의 기독교 관련 기관이 이름을 올렸다. 숫자로만 보면 무역회사, 가발 업소 다음으로 많다. 한인 이민사는 교회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동문회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경기고, 용산고, 휘문고 등 고교 동문회(18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대학 동문회(15개)는 물론 UCLA, USC 등 미국 대학의 한인 동문회까지 설립돼 있었다.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37개의 비영리 기관 및 한인 단체가 운영 중이었는데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분야는 다양하다. 남가주한미정치협회를 비롯한 나성카운티사회봉사부한인지부, 나성의료건강서비스센터, 남가주한인야구협회, 남가주총학생회, 과학기술경영인협회, 한인교향악단, 재미서부태권도협회, 남가주한인교회연합회 등의 단체가 설립돼 있었다.   당시 가주신문사, 기독교신문사, 한미연합신문사, 미주한국어방송국 등 언론사도 다수 운영 중이었다. 미주중앙일보는 한인록 발간 2년 후인 1974년에 창간했다. 인명록을 살펴봤다. 김, 이, 박, 최, 배, 장, 주 등 89개의 한인 성씨를 추려 세대주, 영문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이 실려있다. 인명록으로만 무려 160페이지(한인록 25p~185p)를 할애했다. 한 페이지당 약 30명의 정보가 담겨있으니 4800여 명이 기록돼 있는 셈이다. 인명록을 쭉 훑었다. 대부분의 주소지는 LA다. 낯익은 지역도 더러 보인다. 유재풍(풀러턴). 신중현(세리토스), 안채선(샌타바버라), 유완순(롱비치), 윤병욱(하시엔다하이츠), 윤봉수(코스타메사), 이무용(패서디나), 이명원(샌디에이고), 이수녕(터스틴), 이상훈(헌팅턴비치), 이정숙(리버사이드) 씨 등 LA 외곽 지역 거주자도 간혹 눈에 띈다. 동명이인도 많다. ‘김영호’ ‘이영자’란 이름을 가진 한인은 LA지역에서만 각각 8명이 살고 있었다.     ━   광고로 보는 ‘1972’ : 오늘의 ‘페니’는 내일의 ‘딸라’   뉴요크보험회사 광고 문안 다양한 비즈니스 업소 영업   한인록에는 유일하게 한인 변호사로 이름을 올린 ‘케네스 B. 장(Kenneth B. Chang)’이 있다. 훗날 남가주에서 첫 한인 판사가 됐던 고 장병조(1930~1982) 판사다. 검사로 활동하던 장 판사는 한인록이 발간된 1972년 플라워 스트리트 인근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었다.   당시 한인 은행은 한국외환은행뿐이었다. 광고 문구를 살펴보면 ‘달러’가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엿 볼 수 있다. 한국외환은행은 한인록 전면광고(288페이지)에서 ‘교포 여러분의 예금이 조국 한국의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됨을 고려하시어 많은 이용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금에 대한 비밀은 절대 보장됩니다’라고 홍보했다. 뉴요크생명보험주식회사의 광고 문구는 그야말로 강렬하다. ‘가정의 기둥인 가장에게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남은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3가지 불행이 있을 때’ ‘자신이 사망하는 것도 슬프지만,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써 슬픔 위에 역경을 더하지는 말아야 할 것’ ‘오늘의 페니가 가족을 보호하고 내일의 ’딸라‘를 보장한다.’ 다 같이 자리에 앉아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는 독특한 방식의 ‘한국식 바비큐’는 한류 등의 영향을 힘입어 오늘날 타인종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50년 전에도 K-바비큐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당시 크랜쇼 불러바드의 ‘코리아나 바비큐 하우스’는 ‘당신의 테이블에서 곧바로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며 한국식 고기 굽는 방식을 광고 문구로 담았다. 가주 관광은 ‘관광의 전당’이라며 전면광고를 냈다.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 요세미티국립공원, 샌디에이고 시월드, 카탈리나 아일랜드, 옐로스톤 국립공원 등 관광 프로그램은 대부분 서부 지역 중심으로 구성됐다. 한인록에 담긴 ‘유니버샬수튜디오’ ‘그랜드캐뇬’ ‘뻐스대여’ ‘로스휘릿츠’ ‘녹음 테프’ ‘고급 수에터’ 등 당시 외래어 표기도 눈에 띈다. 한편, 지금은 한국에서 진출한 CGV를 통해 최신 한국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5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버몬트 길에는 ‘한국인 극장’도 있었다. 관련기사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한인 업종 변화…식당 다양해지고 전문직은 더욱 세분화 독자 인터뷰…"읽을거리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해달라" “업소 장수 비결은 고객서비스와 신용” “중앙일보 광고와 25년 영업 함께 했죠” “가족은 나의 힘…전국 최고 딜러로 우뚝 서겠다” “3대째 가업 잇는 자부심으로 진료합니다” 타운 경제의 산 역사, 디지털로 거듭난다 1972년 첫 업소록, 50년전 우리를 만나다 장열 기자페이지 한인 남가주 한인사회 남가주 한인회 당시 한인사회

202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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